고려 말기 왜구의 80%는 고려 사람이었다. 지방을 완벽히 통제못한 고려..!

고려 말기 왜구의 80%는 고려 사람이었다. 지방을 완벽히 통제못한 고려 //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0월 28일 임술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판중추원사 이순몽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도록 상서하였다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삼가 보옵건대, 국가의 성교(聲敎)가 먼 곳까지 퍼져서 변경(邊境)이 근심이 없으며, 인민이 번식(繁殖)하고 호구(戶口)가 많은데도 군액(軍額)이 증가되지 않는 것은, 그 백성이 안정된 뜻이 없어서 부역을 도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도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다른 도(道)로 도망해 옮겨 가서 스스로 양반(兩班)이라 속이고는 문벌이 있는 집에 혼인하여 자식을 낳은 뒤에 잡혀 와서 도로 천인(賤人)이 된 사람까지 있게 되니, 그것이 상도(常道)에 어긋남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고려 왕조의 말기에 왜구(倭寇)가 흥행(興行)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왜인(倭人)들은 〈10명에〉 1, 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본국(本國)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당(黨)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또한 감계(鑑戒)되는 일입니다. 지금 신백정(新白丁)이 평민들과 더불어 섞여 살면서 서로 당(黨)을 만들어 도적이 되어, 소와 말을 도살하는 이익으로써 귀에 젖고 눈에 익어서 보통의 일로 여기고 있으며, 혹은 혐극(嫌隙)으로 인하여 남의 집에 고의로 불지르기도 하니, 장차 방지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 폐단을 구제하는 요령은 호패(號牌)보다 긴절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태종(太宗) 때에 호패(號牌)의 법을 시험해 시행한 지 수년(數年) 만에 유이(流移)하는 사람이 적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민간에 번거롭고 소란하게 한다고 비평하면서 이를 폐지시켰으나, 이 폐단은 적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도적과 유망(流亡)하는 무리들이 날로 성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나, 신은 원...

조선왕조 세종 당시의 군사와 무역

조선왕조 세종 당시의 군사와 무역 조선왕조 세종 당시의 군사와 무역 조선왕조 초기 평안도는 평소 철을 채취하여 조선 각 도들의 성을 쌓는데에 사용했고  조선왕조는 범죄자들로부터 물자를 몰수하고 제용감(濟用監)의 포물(布物)을  가지고 그걸 명나라의 만주 요동반도 식민지 요동과 무역하여 물소뿔과 진사(眞絲)를 수입해와 각궁(角弓)을 만들었다. 군대의 깃발과 깃대를 될 수 있는 대로 경쾌(輕快)하게 만들고,  깃대의 양끝에 칼날을 박았다. 조선군은 갑옷을 만들 때에 소매를 짧게 하여 되도록 경쾌하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귀족의 자제들로서 한가하게 살며 직업도 없는 남자들을  활쏘기와 말타기를 시험하게하고 그들이 가지고있는 마필들을 점고하고  토관(土官)을 제수하고, 고신(告身)을 받거든 곧 직책을 갈고 패(牌)를 지어 윤차로 방어(防禦)하게 하고, 공로를 헤아려서 번갈아 서용(敍用)하였다. 평안도 각 고을의 수령들은 건장하고 실한 남자들은 감고(監考)니, 서원(書員)이니, 일수(日守)니 하는 등류의 명칭을 붙이어 자신들을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 힘 없고 약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군사로 징병하였다. 이때문에 국경의 방비가 허술해졌다. 조선의 중앙 정권은 이런 지방 정부들의 이상한 병역 상태를 좌시하지 않고 고치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은듯 하다.) // During the reign of Sejong in the Joseon Dynasty, military and trade activities were notably managed with strategic foresight and innovation.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Pyeongan Province was a key area for iron mining, which supplied the essential material for constructing fortresses across the provinc...

여말선초 실록이랑 여타 사료들 보면 최영이 이성계 죽이려고 요동 정벌 꾸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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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기의 실록이랑 기타 사료들 보면  최영이 이성계 죽이려고 요동 정벌 꾸몄다고 나온다. 이성계가 명나라에 보낸 편지나 기타 사료들에 그리 나온다. 그 후 정몽주도 요동 정벌 계획 하니까 공양왕이 두려워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꿍 박히고 그 사이 정몽주가 참살당했단다. 근데 고려사와 다른 실록에는 전혀 다르게 적혀있다. 원천석이 고려 말의 일에 대해 적은 개인 기록이 있었는데. 후손들이 그거 보고서 정사하고 너무 달라서 무서워서 불태웠다고 함. 정사를 무조건 믿으면 안됨. 오히려 왕하고 신하들이 나누는 대화라던가 왕이 다른 나라에 보낸 편지같은 거에 잠깐 진실이 스쳐지나가듯이 적혀있음. // 이성계가 명나라에 보낸 편지를 보면 정몽주가 죽은 이유가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돌아보지않고 요동 정벌을 계획해서"라고 나온다. 그래서 도대체 최영의 실패한 자취가 뭐지?하고 사료를 찾아보니 대동야승 해동악부에 "나는 일찍이 비사(祕史)에서 듣기를, “그 당시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의 공명(功名)이 날로 왕성해지고, 또 ‘이씨가 임금이 될 것이다.’라는 풍설이 있었으므로 최영은 아주 그를 꺼렸으나 죄를 씌울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게 하고, 그것으로써 제거해 버리려고 하여 마침내 이 계교가 나왔다.” 하였는데, "라고 나옴. 최영이 요동 정벌 계획한 이유가 이성계 제거를 위해서이고, 그렇다면 정몽주가 요동 정벌 계획한 거 때문에 죽었다는 것도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정몽주가 돌아보지 않았다는 말도 다 이해가 되는거. // =============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는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

조선 세종 시기 조선의 인구

 조선 세종 시기 조선의 인구 호수가 2만 8백 82호, 인구가 5만 3백 52명 【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 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7백 13명, 선군(船軍)이 3천 8백 92명이다. - 조선 세종실록지리지 148권, 경기도 세종실록지리지 148권 경기도에 의하면 세종 시기 조선의 인구는 당시의 파악된 호구수에 8~10배는 곱해야 실제 인구가 나오므로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세종 시기 인구는 350~800만명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1392년) 인구가 554만 9000명 정도로 추산되므로 350만명일 가능성은 거의 없음. 세종실록지리지 경기도와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 (On Population Estimates of the Yi Dynasty, 1392-1910) 논문을 참고하면 세종 시기의 조선의 인구는 680~8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조선의 인구에 대해 신용하-권태완 교수는 인구 성장율을 중심으로 계산하였고 이영구-이호철 교수는 근세의 인구 증가율을 활용하여 과거로 역계산하여 집계하였음. 반면 서양의 역사학자들인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레이그 교수는 호구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인구를 집계했고 이들은 1590년 조선의 인구를 500만으로 집계했음. 임진왜란 조선과 일본 인구수 비교할때 조선의 인구를 500만명으로 보는 주장의 출처는 위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출처인데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보면 알다시피 조선의 호구는 실제 인구와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인구가 500~700만명이란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음. (특히 조선 초기에는 편차가 상당히 심했음)